제가 대학 다니던 시절은 엄청 데모가 많았습니다
그날은 총학생회장이 구속이 되어 구속자 영치금을 마련하기 위해
일일호프집을 열었습니다,
그때 저는 과대표라는 역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웨이터를 해야만 했죠,
이러저리 서빙을 열심히 하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흘렀고,
왠 아리따운 여학생 둘과 함께 온 친구가 날 불렸습니다
" 재성아 일루와봐. 내 친구들이 너 소개시켜 달래. "
" 오케이 "
어차피 파장분위기고 해서 친구와 합류했습니다.
친구는 재외국민특례로 들어온 애였고 ,
주제에 어울리지 않게 아리따웠던 여자분들 또한 같이 외국에서 살던 친구들이었습니다 .
술이 좀 들어가니 지기들 끼리 영어로 솰라솰라.
야들 뭐라는겨?
암튼..친구는 그 중에 한 명에게 관심이 있는 상황이었고,
혼자서 두 명을 상대하기 벅차니 나한테 SOS를 친 것 이었습니다,
분위기 띄워 주려고 참 무던히도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,
그 날 나도 모르게 찍힌 사진에 보면 술에 취해 침을 질질 흘리고 쓰러져 있는
모습인데도 도무지 사진에 찍힌 기억이 나지 않더군요,
친구네 집에서 잠을 자고 다음 날 등교를 했습니다.
당시 총학생회장이 잡혀 가서 구속된 상황이라 매일 같이 학교에서는 데모가 있었습니다.
쓰린 속을 부여 잡고 데모를 하는데 삐삐가 왔습니다
재빨리 학교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봤습니다
" 여보세요. 누구세요? "
" 어, 나야 "
" 내가 누군대? "
" 어제.. 연락하라며. "
" 아.....너 민정(가명)이지? "
" 엇...아닌데..너 걔가 관심이 있었구나. "
" 아..그럼 누구지? 이름이 뭐더라... "
" 됐다. 연락하라더만 이름도 모르고 정말. "
" 정말 미안한대..이름이 뭐야? "
" 정현(가명)이다. "
" 아 맞다! "
사실,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
일부러 이름을 모르는 척 했었습니다,
" 미안미안, 근데 어쩐 일이야? "
" 연락하라며..나 지금 대학로야 나올 수 있어? "
" 그럼~ 당근빳다지. "
삐삐가 필수품이고 시티폰은 아직 나오지도 않은 그 시절에
그 아이는 무려 핸드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.
다시 만나자마저 그녀의 첫마디는 이랬습니다 .
" 야, 이 냄새 뭐야? "
데모하다가 바로 간 거라 최루탄 냄새가 옷에 밴 것 이었습니다 .
" 엉..우리 총학생회장 잡혀 가서 풀어달라고 학교에서 데모하다가 왔어. "
" 대학생 티내냐? "
그 아이는 재수생이었습니다 .
미국물을 오래 먹어서 그런지 결정이 참 빨랐습니다 .
간 보고 밀당이고 뭐고 없이 바로 그 날 부터 사귀기로 했죠.
당시 학교 육교를 건너가서 무엇인가 소비를 하면
바로 자랑거리가 될 정도로 학교 앞과 대학로의 물가 차이는 컸던 바로 그 시절.
그녀 덕에 대학로를 제집드나들듯이 했었습니다 .
소개팅 때만 간다는 전설의 멕시코 레스토랑도 그녀 덕에 처음으로 가봤습니다 .
" 야, 학생이 무슨 돈이 있냐 "
계산하면서 내던진 그녀의 단골멘트였습니다
그러는 지는 직딩인가? -0-
그렇게 우리 사이 계속 쭉 갈 거 같았습니다
여름방학이 되고 농활을 다녀오고,
친구와 당구장에서 밤샘 당구를 치고 짜장면을 먹고 있을 때.
그녀에게 삐삐가 왔습니다 .
" 너 지금 여기로 올 수 있냐? "
" 갑자기 왜? "
" 할 이야기가 있어서 "
" 그래, 지금 바로 갈께. "
그 날은 제헌절이었습니다 .
호프집에서 맥주를 간단히 마시고 노래방에 가고 싶다기에 노래방에 갔습니다 .
노래방이 끝나고 길을 걷는데 그녀가 말했습니다 .
" 야, 우리 당분간 헤어져 있자. "
" 엥?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? "
" 아빠가 나 스파르타식 기숙학원 보낸대 "
" ..그럼 외박도 안되는 거야? "
" 어, 거기 박혀서 나오지 말래. 핸드폰도 당분간 정지시킬꺼래. "
" 헐..언제까지? "
" 수능 끝날 때 까지.
나 안기다려도 돼.
그 때까지 우리 서로 잊지 못한다면 그 때 다시 시작하자. "
" 헐..뭐..어쩔 수 없지. "
아니..이별의 이유가 다른 것도 아니고 기숙학원이라니..
참 당황스러웠습니다 .
그렇게 시간이 흘러갔고 .
교회에서 밤새워 놀다 잠이 든 크리스마스의 오후였습니다 .
별안간 삐삐가 요란하게 울려댔습니다 .
' 나야, 정현이.
잘 지냈어?
나 잊은 건 아니지?
지금 카페에 있는데 아직 나 잊은 거 아니라면 연락줘 '
잠이 갑자기 확 깼습니다 .
그런데 연락을 할 수 없었습니다 .
왜냐하면 그녀의 연락처가 있던 다이어리를 2달 쯤 전에 잃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.
몇 달 동안 전화를 걸지 않아서 전화번호가 가물가물했습니다 .
가운데 두자리인가가 기억이 나지 않는 것 이었죠.
제길.
삐삐치면서 핸드폰 번호 좀 남기지 ㅠ.ㅠ
그 뒤로 음성메시지가 두세개 정도 더 왔습니다 .
' 연락이 없네.
벌써 나 잊은거야?
섭섭하네.
난 아직인데... '
제길..아니라고!!! 단지..단지 전화번호만 기억이 안날 뿐 이라고. ㅠ.ㅠ
그렇게 몇 번의 음성메시지가 오고 그 이후로는 연락이 없었습니다 .
나 또한 결국 연락처를 기억하지 못해서 전화를 할 수 없었습니다 .
그렇게 크리스마스에 진짜 이별을 했습니다 .
몇 년 뒤, 한창 아이러브스쿨이 유행을 할 때 그녀가 졸업한 고등학교에 글을 남겼습니다 .
아니..중요한 전화번호는 기억이 안나고 쓰잘데기 없는 졸업한 고등학교이름만 왜 기억나냐고 ㅡㅜ
하지만 그녀의 소재를 확인할 수 없었죠
난 사람의 이름을 참 기억 못합니다.
20년이 넘은 가장 친한 친구 이름도 가끔 잊을 때가 있고,
사랑스러운 조카들 이름도 헛갈려 할 때가 있습니다 .
그런데 그녀의 이름은 지금까지 또렷하고 얼굴도 또렷합니다 .
아니 두번째 만남에서 카페에 앉아 있던 그녀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.
참 희안하죠
매년 크리스마스가 오면 WAX의 전화 한 번 못하니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립니다
그리고 여전히 저는 솔로입니다
